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흐메트 2세 (문단 편집) === 1453년, [[동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e0063976_4ab4f2005f4d3.jpg|width=100%]]}}} || || '''[[이스탄불|{{{#fff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소재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fff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기록화[* 그 후에 [[2009년]] 이스탄불에 '파노라마 1453'이라는 박물관이 개관했는데 이름부터 이날의 정복을 기념하는 박물관이다. 이 그림보다 엄청나게 큰 그림으로 이 전투를 생생하게 벽화로 그려냈다.][br](그림 왼쪽에 백마를 타고 있는 사람이 메흐메트 2세이다.)''' ||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라고 한다면, 술탄이 된 지 2년 후인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2천년동안 이어진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일이다. 불과 나이 21세의 일이다. 통칭 3중 성벽으로 유명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의 공략을 위해 전통적인 방식 외에도 최초로 '''우르반 [[거포]]'''로 알려진 [[공성포]]를 비롯한 화기를 [[공성전]]에서 사용하여 [[테오도시우스 성벽|성벽]]을 향해 쏘고, 산에 통나무를 깐 다음 기름을 칠해 미끄럽게 만들고 사람들이 끌어 육지를 통해 함대를 금각만으로 옮겨 양방향 공격을 가하는 과감무쌍한 전법을 동원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속담이 이루어진 셈. 실제로도 사공이 많았다 하며, 이 에피소드에 충격을 받아 쓰인 소설도 있다. 다만 이때로부터 10여 년 전에 베네치아가 이미 육지로 배를 옮긴 바가 있으며, 그리스 신화의 영웅 가운데 하나인 [[이아손]]의 이야기에도 [[아르고 호의 원정|아르고 호]]를 등에 짊어지고 북아프리카를 횡단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바이킹]]도 필요한 경우 배를 육지로 끌고 가기도 했다. 즉 참으로 적절한 때에 알맞은 전술을 쓰기는 했지만, 메흐메트 만의 창의적인 발상은 아닌 셈. 헌데 이 배를 옮긴 지형이 사람이 배를 옮기기에 호락호락한 지형은 아니다. 2016년 현재 그 길을 안내판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베식타쉬 항구 근처에서 당시의 갈라타 성벽을 빙 돌아서 쉬쉬하네까지 간 다음 거기서 배를 띄웠는데 거리만 2km에 거의 200m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동시에 엄청난 물량을 아낌없이 퍼붓는 오스만 특유의 전법을 썼는데, 물량공세라고만 하면 숫자만 믿고 될 때까지 쏟아 붓는 무식한 전법을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군|오스만군]]의 공성 전법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일단 대포 자체가 당시로서는 최첨단 병기였고,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판 다음 화약을 매설하여 폭파하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오스만의 마지막 영토 확장 시도라고도 평가 받는 [[제2차 빈 공방전]]에 이르기까지 오스만군의 기본적인 공성 전법으로 자리잡는다. 이를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도의 대도시를 불과 7주 만에 공략하는 위업을 세우게 된다. 이후 그리스는 400년간 튀르키예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오스만의 칼날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공방전에서 동로마가 서방 의용군을 포함하여 7천 명을 동원했지만, 현재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오스만 군은 대략 8만의 병력을 동원했다. 목격자들은 최소 10만에서 최대 30만까지 병력을 부풀려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